조선 왕릉,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

우리나라에는 조선을 세운 태조를 중심으로 총 42기의 무덤이 현존하고 있다. 조선의 27명의 왕과 그 왕비의 묘를 통틀어 ‘조선 왕릉’이라고 하는데 한 왕조의 무덤이 500년 넘게 유지되어 온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조선의 역사. 지금부터 500년 조선이 우리에게 전하는 생생한 역사 이야기 속으로 떠나보자.

 

 

 

조선 왕릉,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다

 

2009년 6월, 조선 왕릉 40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주요한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총 42기 중 북한에 자리하고 있는 2기의 왕릉은 제외되 었다. 전통을 기반으로 한 건축 양식과 조경 양식으로 세계 유산적 가치를 인정받은 조선 왕릉. 제례의식 등 600년 넘게 이어가고 있는 무형의 유산을 통해 역사적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하나의 왕조가 5백 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 조선 왕릉은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가 있다.

 

 

 

4 (2)

 

왕릉의 구성

왕릉은 크게 진입 공간, 제향 공간, 능침 공간 등 세 공간으로 구분된다. 속계와 영계를 가르는 금천교,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홍살문까지가 왕릉의 진입 공간으로 산 자들의 영역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 까지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하는 제향 공간이며 혼유석, 봉분 및 각종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능침 공간은 신의 영역으로 불린다.

 

 

 

5 (2)

 

왕도 함부로 갈 수 없는 공간. 영혼이 나와 노니는 돌 ‘혼유석’

 

금천교, 홍살문, 참도, 정자각까지가 누구나 갈 수 있는 공간이라면 정자각 그 이상은 그 시대 왕이라 해도 올라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봉분 앞에 놓인 가로 약 3m, 세로 2m, 높이 50cm의 거대한 돌, 바로 ‘혼유석’에 그 비밀이 숨어있다. ‘영혼이 나와 노니는 돌’이라는 뜻의 혼유석은 조선 왕릉의 독창적인 양식이자 왕릉과 일반 무덤을 구분하는 특징이다. 혼유석은 조선 왕릉만의 독창적 조각이다. 혼유석 밑에는 4~5개의 박석이 있고 그 아래에 왕의 시신이 안치된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6 (2)

 

태조의 무덤은 억새풀로 덮여있다?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 조선의 개국시조 태조 이성계가 누워 있는 곳이다. 태조의 릉은 나라와 도읍을 처음 세웠다는 의미를 담아 건원릉이라 이름 지어졌다. 하지만 태조가 동구릉에 묻힌 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또한 다른 왕릉과 달리 태조의 봉분을 가득 덮은 것은 부드러운 잔디가 아닌 무성한 억새.

여기에는 숨은 사연이 있다. 생전에 태조는 자신의 고향인 함흥에 묻어달라는 유지를 남겼다. 하지만 그의 아들 태종은 한양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개국시조를 모실 수 없다는 것이 이유로 아버지가 그리워하던 함흥의 흙과 억새풀을 가져와 봉분을 덮는 것으로 아버지의 유지를 대신했다고 한다.

 

 

 

7 (1)

 

조선 최초의 합장, 세종과 소헌왕후가 함께 누워있는 영릉

 

여섯 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얻어 자식 부자로 알려진 세종. 하지만 정비인 소헌왕후와 의 금슬은 유난히 좋았다고 한다. 슬하에 8남 2녀를 둔 것만 봐도 부부 금슬이 얼마나 애틋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

소헌왕후는 세종보다 5년 먼저 죽었는데 세종이 자신이 죽을 때 꼭 소헌왕후와 함께 묻어달라고 하여 한 봉분 아래 모시게 되었는데 이것이 조선 최초의 합장릉 인 셈이다.

 

 

 

8 (1)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옆자리가 비어있는 곳, 홍릉

 

서오릉에 자리잡은 홍릉의 주인, 영조의 원비인 정성 왕후. 영조는 일찌감치 능지를 정할 당시 왕비릉 의 오른쪽 자리를 비워두었고, 석물도 쌍릉을 예상하여 배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으로 인해 생긴 할아버지에 대한 서운함, 섭섭함에서 였을까?

정조는 정성왕후 옆에 묻어 달라는 영조의 유지를 차갑게 외면한 채 동구릉에 장사를 지냈다. 이로써 홍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옆자리가 비워있는 왕릉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250여 년 동안 정성왕후는 홀로 외롭게 잠들어 있다.

 

 

 

9 (2)

 

죽어서도 함께하지 못한 비운의 왕과 왕비, 단종과 정순왕후

 

12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수양대군에 의해 실권을 다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던 왕 단종. 유배지에서도 삶은 평탄하지 못했는데 끝내는 영월 관아에서 사사되고 시신은 강물에 버려지게 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영월의 관리 엄흥도가 몰래 거두어 자신의 선산에 아무도 모르게 묘를 만들어주었다. 아무도 모르게 강원도 영월에 자리하고 있던 단종의 묘는 단종 사후 240년이 지난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고 모양새를 갖췄다. 더 가슴아픈 것은 평생 떨어져 만나지 못한 정순왕후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평생을 단종을 향한 그리움으로 살다간 정순왕후.

서인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거두는 이가 없자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시가에서 자신들의 선영인 경기도 남양주에 왕비를 모셨다고 한다.능호가 ‘사릉’인 이유도 다른 왕릉과 달리 일반 묘역 근처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이다. 경기도 남양주에서 강원도 영월까지는 그 거리만도 수 백리. 살아서도 평생 그리움으로만 지내다 죽어서도 함께하지 못한 비운의 왕 단종과 정순왕후. 조선 왕릉의 왕과 왕비 중 가장 멀리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하는 슬픔을 안고 있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조선왕릉_수정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