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음식을 피하게 되는 여름이다. 차게 식힌 육수에 푸짐하게 만 냉면 한 그릇이면, 없던 입맛도 다시 살아날 정도이다. 그 어느 계절보다 가장 많이 찾는 냉면. 하지만 이 시원한 냉면이 겨울철 음식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 그렇다면 여름에 냉면을 먹으면 그 맛이 덜할까? 조선시대부터 우리 민족이 즐겨 먹던 냉면의 속 깊은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조선시대부터 먹어오던 한국 고유 음식!
여름에는 중국요리 전문점에서도 쉽게 냉면을 접한다. 이름하야 중국식 냉면. 그렇다면 우리의 냉면이 중국에서 유래한 건 아닐까 싶은 의구심이 생긴다. 한데 중국식 냉면과 우리의 냉면은 생김새와 맛도 천지 차이. 게다가 <동국세시기>, <진찬의궤>, <규곤요람>, <부인필지> 등의 자료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이 먹던 한국 고유 음식이라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메밀가루에 녹말을 적절히 혼합해 반죽한 후 국수로 만들곤, 편육과 배채‧오이채와 함께 큰 그릇에 보기 좋게 담는 냉면. 이때 삶은 달걀 반 토막은 중요한 고명 중 하나이다.
이것이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 냉면인데, 지금도 모양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여름에는 쇠고기 육수를, 겨울에는 동치미 국물을 넣었던 것이 지금은 모든 냉면에 쇠고기 육수로 보편화된 것이 달라진 정도랄까.
물론 각 지방의 이름이 냉면 앞에 고유명사처럼 붙여지고, 그에 따라 조리법과 종류는 구분되어진다. 이중 북한 지방의 이름이 붙여진 냉면이 더 유명한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냉면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함흥냉면과 평양냉면을 살펴보면, 냉면이 왜 겨울철 음식이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될 것 같다.
비빔냉면의 원조 함흥냉면, 추운 겨울 몸에 열을 내다
유난히 겨울이 길고 추운 북쪽 지방. 그중 평양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함흥 지역에선 대부분의 음식들이 강한 맛을 내는 게 특징이다. 보드카의 그 독한 술도 술술 넘기는 러시아 사람들을 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추울수록 몸에 열을 내기 위해, 일부러 독주나 자극적인 음식을 먹는 건, 어느 나라나 다 비슷한 삶의 지혜 같은 풍습이다.
특히 함흥냉면의 특징은 겨자의 맛으로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겨자가 그 맛을 이끈다. 이는 겨자의 성분이 우리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 추운 날 차가운 냉면을 먹으면 입안은 차가울지 모르지만, 막상 목으로 넘기면 그때부터 몸 여러 곳에서 열기를 체감하게 된다.
그렇다보니 함흥냉면은 몸에 열을 내는 매콤한 비빔냉면(가자미와 홍어 등의 생선회에 고추장으로 양념)의 원조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이 있다. 얼마 전, 한 종편방송사의 프로그램인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선 새로운 사실 하나가 알려졌다. 함흥 출신으로 보이는 한 탈북미녀의 말에 의하면, 함흥에는 냉면이 없다는 충격과도 같은 증언.
함경도 지방은 워낙 지형이 험준해서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 농작을 할 수 없는 땅이라는 것인데, 대신에 감자전분으로 그 냉면의 역할을 대신했다 한다. 그렇다보니 냉면이라는 단어 자체도 없고, ‘감자 농마 국수’만 있다 했다. 참고로 농마는 녹말의 북한말. 지금의 함흥냉면 배경은 한국전쟁 이후 함흥에서 내려온 여러 실향민들이 속초 등 강원도 일부 지역에 감자 농마 국수집을 열면서 이름도 ‘함흥냉면’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따라서 감자 농마 국수에서 유래된 진짜 함흥냉면은 지금도 속초에 가면 그 맛을 확인할 수 있다.
그중 한국 전쟁 발발 65주기와 똑같은 65년 전통으로 소문난 속초함흥냉면이 가장 대표적이라 한다. 이곳에선 고명으로 올라오는 것이 명태회무침. 쫀득쫀득하고 특유의 감칠맛이 나는데, 냉면을 다 먹으면 빈 그릇에 뜨거운 육수를 부어 먹는 것이 전통 냉면의 입가심이다. 소화를 돕기 위해 다 먹은 밥그릇에 물을 부어 마시던 옛 어른들의 풍습과 비슷하다.
물냉면의 지존 평양냉면, 고춧가루가 들어가 붉은 빛
함흥냉면이 감자 전분이라면 평양냉면은 오리지널 메밀을 주재료로 사용한다. 그리고 함흥냉면이 비빔냉면의 원조라면, 평양냉면은 물냉면의 지존. 앞서 언급한 겨울의 동치미 국물을 그 육수로 사용했던 것은 바로 평양냉면에서 유래된 것이다. 서북지방에서 자라는 긴 무로 담근 동치미 국물을 차갑게 식혀 두었다가 메밀 순면에 곁들여 먹었다는 겨울 음식인 평양냉면.
하지만 여기에도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 하나가 더 있다. 메밀로 면을 뽑아 만들어 먹던 전통은 평양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 일부 지방을 빼곤 모든 한반도에서 이 메밀을 경작했는데, 남한의 여러 지방에서도 메밀국수는 널리 보편화된 음식이었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그 어떤 지방의 메밀국수보다 평양냉면이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면서, 점차 유명세를 떨치게 됐고 메밀 하면 평양냉면이라는 공식이 성립됐다. 다른 첨가물 없이 100% 메밀로 면을 뽑곤, 겨울엔 동치미 국물, 여름엔 쇠고기 육수로 맛을 내던 평양냉면. 맛도 진하고 깊어 그 누구든 맛을 보면 다른 지역의 냉면은 쳐다보지 않을 정도였다.
평양냉면은 겨자 대신 식초를 많이 뿌린 후 고춧가루를 넣어 먹는 것이 특징. 한창 남북교류가 이뤄지던 때 옥류관에서 그 맛을 봤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남한의 냉면과는 확연히 다르다 했다. 물냉면인데 고춧가루를 사용해 붉은 빛이 나고, 냉면 속에 닭고기와 돼지고기가 들어가 있고, 육수는 쇠고기로 맛을 냈는데도 덜 자극적인 느낌이었다고.
이는 깊고 진한 육수였다는 일제강점기 때의 평가가 잘못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맛이 북한의 맛 보다 강한 화학조미료에 길들여진 것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보니 남한에선 오리지널 평양냉면을 쉽게 맛볼 수 없다는 결론. 통일이 되면 옥류관 등에서 맛을 볼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별다른 방법이 없어 마냥 아쉬울 뿐. 딱 한 가지의 방법은 있다. 중국과 캄보디아 등으로 여행갈 경우에 북한에서 운영하는 식당을 찾으면 된다. 실례로 중국 상해에 있는 평양 옥류관 식당에서는 그 옥류관의 맛 그대로를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