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더울 때 문화생활을 누리기는 힘들다. 불쾌지수가 팍팍 올라가는 고온다습한 날씨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그럴 듯한 전시장•공연장을 찾는 데 에너지를 쏟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력이 한 장 더 넘어가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짧은 여름휴가를 통해 몸이 즐거움을 만끽했다면, 이제는 여유 있는 문화생활을 통해 마음의 즐거움을 누릴 차례다. 다가오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영혼과 내면을 풍부한 마음의 양식으로 살찌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당신이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제대로 된 문화생활을 즐기고자 한다면, 이번 9월이야말로 가장 맞춤한 때다. 이번 달에 가볼만한 전시와 공연을 살펴본다.
“나는 뚱뚱한 사람들을 그리지 않는다”
– 페르난도 보테로 전
*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 일시: 2015.7.10.~10.4.
이보다 더 ‘풍성’한 그림이 있을까. 콜롬비아 출신의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는 뚱뚱한 사람을 그린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비현실적으로 풍만하고 양감이 강조돼 있다. 그는 인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감성을 환기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왜 뚱뚱한 사람들을 그리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는 의외의 대답을 한다. “나는 뚱뚱한 사람들을 그리지 않습니다.” 혼란스럽다. 저렇게 하나같이 다 뚱뚱한 사람을 그려놓고 자신은 뚱뚱한 사람을 그린 게 아니라니! 작가에게 있어 대상이 살 쪘느냐 안 쪘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단지 볼륨을 사랑하고 비정상적으로 과장된 비율에서 미적 아름다움을 느낄 뿐이다. 변형과 변신의 미(美)다.
1)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Angulo), ‘영부인(THE FIRST LADY)’
2)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Angulo), ‘대통령(THE PRESIDENT)’
그렇지만 감상자가 그림을 보며 느끼는 생각은 자유다. 이를테면 작가가 날씬하고 비쩍 마른 사람들만을 선호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풍자하면서, 살찐 사람들에게 격한 애정을 쏟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한 것이다. 작가는 작가고 나는 나니까.
‘페르난도 보테로 전’은 지난 2009년 서울에서 열렸던 전시에서 관람객 20만 명을 기록하며 큰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이처럼 그의 작품이 무척이나 재미있고 흥미롭다는 것은 이미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애정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다. 이번 페르난도 보테로 전은 보테로 특유의 유머감각과 화려한 색채, 남미의 정서를 살린 다채로운 작품들을 감상할 좋은 기회다.
“나는 지루한 것을 좋아한다”
– 앤디 워홀 LIVE 전
*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배움터 디자인전시관
* 일시: 2015.6.6.~9.27.
‘20세기 팝아트의 아이콘’, 앤디 워홀. 그는 대중적인 상징을 실크스크린 인쇄 기법을 통해 캔버스 위에 반복해서 찍어낸 작품으로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나는 지루한 것을 좋아한다. 나는 똑같은 것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 좋다”는 그의 말은 한편으로는 진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은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신기하게도 전혀 지루하지 않으니까. 가령 마릴린 먼로의 입술 옆에 찍힌 섹시하기 그지없는 그 점이 수없이 반복된다고 과연 식상하다 할 수 있을까?
이번 전시회에선 워홀의 유년기 사진, 뉴욕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할 때의 드로잉, 1960~70년대 실크스크린, 마릴린 먼로를 비롯한 유명인 초상을 이용한 작품, 제작 영화 등 400여점의 작품이 소개된다. 1985년 앤디워홀미술관이 30년 만에 발견한 미디어 아트 10점 중 워홀의 자화상 2점과 캠벨 수프,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응용작 등 4점이 한국에서 처음 공개되기도 한다. 판에 박힌 듯 찍어낸 것은 무조건 싫다고? 워홀 앞에서 그런 소리 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군자’의 품격과 절개
– 간송문화전 4부 매,난,국,죽 – 선비의 향기
*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
* 일시: 2015.6.4.~10.11.
어몽룡, ‘묵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사군자’의 품격과 절개나 너무나도 절실한 시대다. 우리 옛 그림의 보고 간송미술관이 ‘간송문화전 4부 매,난,국,죽 – 선비의 향기’ 전시를 통해 사군자의 아름다움을 일깨운다. ‘1부 간송 전형필’, ‘2부 보화각’, ‘3부 진경산수화’에 이은 4번째 외부 전시다. 조선중기부터 말기까지 화가 31명이 그린 사군자 명품 100여점의 작품과 현대 미디어아트가 함께 전시됐다.
이정, ‘풍죽’
‘풍죽’은 한국회화 역사상 최고 묵죽화가로 평가받는 이정의 묵죽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거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대나무 네 그루가 휘몰아치는 강풍을 맞고 있는데, 한복판에 자리한 한 그루의 대나무는 댓잎만 나부낄 뿐 줄기는 탄력 있게 바람에 맞서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고난과 시련에 맞서는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풍죽 본래의 의미와 미감을 이만큼 잘 살려낸 작품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연인 ‘로미오와 줄리엣’
– 로미오 앤 줄리엣
* 장소: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 일시: 2015.9.12.~10.11.
뮤지컬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작품을 놓치기 어려울 것이다. 프랑스 3대 뮤지컬 중 하나인 ‘로미오 앤 줄리엣’이 2007, 2009년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을 찾는다. 프랑스에서 2001년 초연한 이 작품은 세계 18개국에서 관객 650만 명을 불러들였고, 실황 음반도 1억장이 판매됐다. 오리지널 팀의 내한공연인 만큼 공연의 수준은 보장할 만하다. 작곡가이자 작품의 원작자인 제라르 프레스귀르빅도 “2015년 공연에는 새로운 곡들이 추가되는 등 전체적으로 작품이 업그레이드되었다”고 밝혀 기대감을 높인다.
‘로미오 앤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만큼 줄거리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관람의 관건은 역시 화려한 볼거리와 감미로운 음악. 무대는 몬태규 가와 캐퓰렛 가의 골 깊은 대립을 푸른색과 붉은색의 대조로 강렬하게 표현했다. 프랑스 뮤지컬답게 음악과 연기 외에도 현대무용과 아크로바틱 등이 섞인 역동적인 춤도 선보인다. ‘세상의 모든 왕들’, ‘사랑한다는 건’ 등 대표적 음악 넘버들 역시 듣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