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반복하다가 급기야 거짓말을 실제로 믿고 행동하는 경우를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한다. 리플리 증후군은 정신과에서 통용되는 진단명은 아니다. 리플리는 <재능 있는 리플리 씨>로 시작되는 미국 여류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시리즈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다. <재능 있는 리플리 씨>는 프랑스 배우 알랑 드롱이 주연을 맡아서 <태양은 가득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이 영화가 세계적으로 히트를 하게 되면서 누군가 다른 사람의 행세를 하고 다니는 것을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하게 되었다.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인 리플리는 우연히 부자인 친구를 죽이고, 그 사람으로 행세한다. 리플리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그 사람으로 대하면 순간적으로 착각을 한다.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를 잊지는 않는다. 그래서 주인공은 원래 자신의 신분을 계속 감추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죽인 부자의 애인을 빼앗기까지 하지만, 결국 친구의 시체가 발각되어 파탄을 맞는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 포스터(출처: 네이버 영화)
어떤 사람이 명문대학에 합격을 하지 않았지만 학생증을 위조해 그 대학교에 다니는 척을 한다. 또 졸업장도 위조해 그 사람의 이름으로 좋은 회사에 들어간다. 이런 경우는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원래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계속 노력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명문대학에 다니지 않지만 자신이 진짜 그 대학에 다닌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이는 리플리 증후군이라기보다는 망상에 더 가깝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본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 대학을 다닌다고 믿고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쉽게 들통이 난다.
‘리플리 증후군’의 경우 자신이 진짜 그 대학을 입학한 것이 아니라는 것, 자신이 진짜 의사가 아니라는 것, 자신이 진짜 변호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때문에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서 노력한다. 하지만 ‘망상’의 경우는 자신이 진짜 그 대학에 입학을 했다고, 자신이 진짜 의사라고, 자신이 진짜 변호사라고 믿고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하면서 자신을 숨기기 위한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더 쉽게 의심을 하고 알아채게 된다.
그러나 나중에 가면 시간을 원래로 돌리려야 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계속 속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견딜 수 없이 끔찍한 고통이 된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절대로 늙지 않는 주인공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고통 받던 것처럼 말이다.
범죄인들을 보면 신분 사기를 치는 이는 신분 사기만 계속하고, 빈집털이를 하는 이는 빈집털이만 계속한다. 신분 사기를 치는 사람들 중에서도 있지도 않은 병이 있다고 동정을 사는 이는 계속 불쌍한 척을 하고, 명문대를 나온 재벌2세라면서 상대방을 속이는 사람은 계속 VIP 행세를 한다. VIP 행세를 하면서 사기를 치는 이들은 돈도 돈이지만 남들이 자신을 VIP로 대접해줄 때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사기꾼들이 VIP 신분으로 위장을 하고 다니는 것은 모두 돈 때문이다. 그들은 사기행위가 끝나면 다시 자신의 본래 신분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돈 때문에 타인의 신분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리플리 증후군의 경우 이상과 현실이 괴리되어 있다. 굉장히 멋진 모습이고 싶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보잘 것 없다. 그 간극이 너무 넓다. 간극이 너무 넓다보니 절망에 빠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가능한 이상을 포기하고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게 마련이다. 청소년기, 성인기 초기에는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리플리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의 경우는 불가능한 꿈을 포기하지 못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명문대에 가는 것, 의사가 되는 것, 변호사가 되는 것,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 억만장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다 어느 날 발상의 전환을 한다. 그냥 명문대를 졸업했다고 졸업장과 성적표를 위조하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름 없는 대학을 나왔다고 할 때는 무시하던 이들이 명문대를 나왔다고 하니 나를 다르게 대해준다. 명문대 출신이나 자기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의사라고 하니까, 변호사라고 하니까, 대기업 직원이라고 하니까 여자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진짜 의사, 변호사, 대기업 직원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바보 같아 보인다. 속이는 내가 잘못이 아니라 속는 그들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 같이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의사, 변호사, 대기업 직원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이 오히려 잘못되었다고 자신을 합리화한다. 과거에 가난했을 때 힘들다고 도움을 청해도 세상은 나를 본체만체 했다.
그런데 억만장자인 척 하니까 사람들이 오히려 나에게 돈을 빌려주고 투자를 한다. 자신이 꿈꾸던 삶을 누리기 위해서 다른 사람인 척 하는 것이다. 진짜인 나를 부정하고 가짜인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가짜인 척 하면 할수록 진짜인 나와는 점점 더 멀어진다.
진짜인 나와 가까인 나의 간격이 멀어지다 못해 나중에는 자아가 찢어져 버린다. 그냥 가짜인 내가 진짜라고 믿으면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나는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언제까지 세상을 속일 수는 없다. 사람들이 진짜인 나를 알아차릴 때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열심히 노력해 꿈이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열심히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허다하다. 돈이 없어서, 가족을 돌보느라, 병에 걸려서, 고생에 지친 나머지 우리는 가장 집중해야 할 때 집중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게 된다.
생각하지 못한 한 번의 불행 때문에 여태까지 이루어 놓은 것을 포기하고 꿈을 접기도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이번 한번 뿐이야”, “이쯤은 괜찮겠지” 하면서 상황과 타협하면서 꿈과 아득히 멀어지기도 한다. 억울하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내가 현재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현실이다. 아무리 칙칙하고 괴로울지언정 지금 여기가 내가 존재하는 현실세계다.
인생을 살다보면 사다리도 없고, 장대도 없고, 집게도 없는데 높은 곳에 있는 열매를 따야 하는 경우를 맞게 되는 수가 있다. 그런데 나한테 주어진 것이 삽 한 자루 뿐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손에 닿지 않는 열매를 따기 위해서는 흙을 쌓아올려 튼튼한 토대를 만들고, 그 토대에 또 흙을 쌓아올려 높이를 높여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이 인생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현실세계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면서 가짜인 나를 진짜라고 믿으면서 살게 된다.
리플리 증후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멀어진 현실세계와 소통을 하고, 존재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