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종이통장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손에 잡힌다는 것’이 중요하다. 남녀 간 사랑도 서로 마음만으로 확인하면 될 것을 굳이 언약의 반지를 손가락에 끼는 것으로 확인하려 한다. 꼬마 아이들도 생일이나 크리스마스만 되면 캐릭터 장난감으로 부모의 애정도를 테스트 한다. 고귀한 사랑의 행태도 이럴진대 하물며 냉철한 돈의 세계는 어떠하랴.

차곡차곡 월급을 모으는 적금을 들었다면, 매달 통장에 늘어가는 숫자를 확인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낙이 된다. 그 숫자를 들여다보고 만지고 음미하면서 오늘보다 나아질 미래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행복의 감촉’도 곧 종말을 고할 예정이다. ‘종이통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내 손에 잡히는’ 돈의 증거가 모두 사이버공간으로 떠나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종이통장의 종말, 그 이유는?

금융감독원이 지난 7월 발표한 ‘무통장 금융거래 혁신 방안’에 따르면 2017년 9월부터 은행에서 계좌를 만들 때 종이통장이 발급되지 않는다. 인터넷·모바일뱅킹이 확산되면서 통장의 필요성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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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종이통장은 이래저래 많은 비용이 들었다. 고객이 통장을 분실·훼손하거나 인감을 변경할 경우 통장 당 2000원의 수수료를 내고 재발급 받아야 했다. 이렇게 지출되는 돈이 1년에 60억 원에 달한다. 또 해마다 1000만개 가량 종이통장을 찍어내는 은행들도 제작비용과 인건비·관리비로 통장 하나당 5000~18000원의 비용을 쓰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은행들이 이제 종이통장에 작별을 고하고 있다. 1897년 국내 첫 상업은행인 한성은행이 생긴 이래 120년 동안 사용된 종이통장이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게 우리나라만의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전자금융이 활성화되면서 미국은 이미 1990년대, 영국은 2000년대에 종이통장 발행을 중지했다. 중국 역시 고객이 요청할 때만 발행한다.

 

 

종이통장 이후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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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통장이 곧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총 3단계에 걸쳐 퇴출 수순을 밟는다. 1단계로는 오는 9월부터 2017년 8월까지 종이통장을 발급받지 않는 고객에게 은행이 자율적으로 금리우대•수수료 경감 등의 인센티브를 준다. 2단계는 2017년 9월부터 2010년 8월까지 신규 고객에게 원칙적으로 종이통장을 발행하지 않는다.

다만 고객이 60살 이상 고령자이거나 금융거래기록 관리 등을 이유로 종이통장 발행을 희망할 때는 예외로 한다. 3단계 조치로 2020년 9월부터는 종이통장을 원하는 고객에게 별도로 통장발행 원가의 일부를 부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빠르면 올 9월부터 종이통장과 헤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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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통장이 사라지면 계좌 및 자금 관리는 어떻게 할까? 거래내역은 이미 금융기관들이 시행 중인 전자통장을 활용해 확인할 수 있다. 전자통장은 현금카드 IC칩에 계좌정보를 담아 창구나 현금인출기에서 종이통장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은행은 고객의 e메일로 거래명세서를 정기적으로 보내는 방안이나 예금증서를 발행하는 방안 등을 추진하고 있다. 모든 것이 카드 또는 온라인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해킹이나 전산사고의 위험은 없을까? 물론 있다. 하지만 은행들은 메인 전산시스템 외에 물리적으로 분리된 공간에 백업 시스템을 구축해놓고 있기 때문에 금융거래 내용이 안전하게 관리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해놓으면 해킹도 불가능하고 거래정보도 아무 탈 없이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음, 그렇다면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종이통장의 추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감촉과 변변치는 않지만 거기에 찍힌 숫자들로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던 종이통장의 추억을 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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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담당자들의 말에 따르면, 아직도 상당수 고객들이 계좌를 만들 때 실제 손에 쥘 수 있어야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중·장년층일수록 더 그렇다. 그도 그럴 것이 스마트폰은커녕 인터넷도 없던 시절, 월급을 아껴 꼬박꼬박 통장에 돈을 저축해 전셋집에, 자식들 대학등록금 마련에, 시집 장가까지 해결했던 종이통장인데 어찌 그를 잊을 수 있을까.

예금통장, 적금통장, 급여통장, 비과세통장, 청약통장, 주택통장, 커플통장, 캐릭터 통장… 그 이름도 참 다양했고, 많은 사람들을 웃고 울게 했다. 계좌 종류야 그대로 남아있고 앞으로 더욱 많아지겠지만, 어쨌든 내 손에 쥐고 만질 수 있는 통장은 이제 보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면 내 돈도 그대로이고, 계좌도 그대로인데도 왠지 모를 허탈한 느낌을 느끼는 이도 많아질 것 같다. 비용절감과 편의라는 이름의 경제논리가 오랜 관성으로 쌓여진 추억마저 앗아가는 것 같아 조금은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