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람들] “한글 폰트는 글씨 아닌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석금호 산돌커뮤니케이션 대표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매년 맞이하는 기념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글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되새기지 않고 보낸다. 한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만든 사람과 반포일, 창제 원리가 분명하게 밝혀진 문자이다. 한글, 더 정확히 말해 <훈민정음 해례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한글날을 앞두고 한글의 소중함을 많은 사람들에 알리고자 한글 폰트의 디자인을 시작한 산돌커뮤니케이션 석금호 대표이사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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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동의 한 골목길, 이층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사무실이 산돌커뮤니케이션이다. 빨간 벽돌, 입구 근처에 자리 잡은 대문만한 산돌의 첫 자음 ‘ㅅ’, 이층계단 사이로 보이는 자음들, 디자인 폰트 회사답게 이채로운 외관과 내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석금호 대표이사. 올해로 창립 31주년을 맞이한 한 기업의 대표이지만, 그는 아직도 열정과 패기로 똘똘 뭉친 청년 같다. 한글에 대한 애정으로 시작했던 일인 만큼, 그에게 회사는 사업이 아니라 누군가는 당연히 해야 할 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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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글 폰트를 개발하는 회사인 만큼 매년 돌아오는 한글날이 특별하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석금호 대표님과 산돌커뮤니케이션에게 한글날은 어떤 의미인지요?

한글은 우리나라가 가진 자랑스러운 지적 자산이라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편하게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한글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고 사는 것 같습니다. 마치 거지왕자가 자기의 신분이 왕자인 것을 모르고 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우리는 한글이라는 굉장한 보물을 가졌습니다. 한글날을 맞아 한글이라는 보물의 가치를 되새기고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Q. 산돌커뮤니케이션에서는 한글날과 관련된 행사를 따로 진행하는지요?

그동안 꾸준히 한글날 관련 행사를 진행해왔습니다. 회사가 대학로 근처이다 보니,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이벤트를 했었습니다. 작년에는 대학로 상상마당에서 한글의 우수성과 함께 산돌커뮤니케이션의 폰트도 알렸고요. 캘리그라피로 원하는 내용을 써주기도 했습니다. 올해는 온라인에서 한글 폰트와 관련된 이벤트를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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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KT&G 상상마당에서 진행되었던 한글날 행사 <2014 한글날 테마파크 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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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서 진행되었던 한글날 행사<2013 한글이 보물이다>

 

Q. 산돌커뮤니케이션이 올해로 창립 31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혼자서 시작했던 회사인 만큼 감회가 새로울 것 같습니다.

시간이 오래될수록 타성에 젖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배부르고 여유로워지면 말이죠. 다행히 제게는 아직도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30년이 지났지만 말입니다. 한글의 가치를 알려야 한다는 것, 그 목표를 위한 제 마음과 열정은 더 굳건해지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감이 커집니다. 한글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기업이 해야 할 일들이 실제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시장이 글로벌화 되면서 한글 폰트 산업도 함께 광범위하게 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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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신규 Sandoll 국대떡볶이 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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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신규 Sandoll 하이테크 폰트

 

Q. 최근 프랜차이즈 브랜드 ‘국대떡볶이’와 함께 떡볶이를 모티브로 한 신규 폰트 ‘산돌 국대떡볶이’를 출시했습니다. 어떤 폰트인지 취지와 목표 등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최근 십년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CI(Corporate Identity), 사인(SIGN), 로고타입(logotype) 등을 가지고 브랜딩을 했습니다. 지금은 기업 고유의 한글 폰트를 만들어 브랜딩을 하고 있습니다. 산돌커뮤니케이션에서 진행한 현대카드 한글 폰트 브랜딩이 대표적인 성공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글폰트를 자신의 얼굴처럼 포장해서 기업이미지를 홍보하는 것이죠. 삼성, 엘지 등 대기업에서도 한글폰트를 통한 브랜딩의 성공사례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여러 기업에서 자신의 브랜드를 한글폰트로 홍보하고 싶어 합니다. 최근에는 남성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인 ‘스웨거’와 ‘우아한 형제’의 ‘배달의 민족’과도 작업을 했습니다. 그 작업의 연장선에 ‘국대떡볶이’도 있는 것입니다.

 

 

Q. 한글에 대한 애착심을 만들어준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산돌커뮤니케이션이란 회사를 만들기 전, 리더스다이제스트 한국판의 아트디렉터로 일했습니다. 당시 인쇄기계가 일본에서 수입한 것임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당시 많이 쓰이던 굴림체도 일본어 가타가나용으로 개발된 ‘나루체’를 한글용으로 변형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인쇄기계를 사다 쓰지 않으면 출판이 불가능한 현실이 수치스러웠습니다. 일본이 만든 인쇄기계 없이는 책 한권도 만들 수 없는 현실에 자존심도 상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수치심을 느꼈고, 그렇게 한글 폰트를 개발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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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직도 주변에는 굴림체가 일본어에서 비롯된 폰트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루체는 일본인 디자이너가 개발한 서체입니다. 나루가 굴림이란 뜻인데, 한글버전으로 나온 것입니다. 굴림체는 디자인에 대한 뚜렷한 정체성도 없이 지난 20여 년 동안 마이크로소프트 운영체제의 기본 서체로 쓰였습니다. 품질도 상당히 어설프고 낙후된 디자인이었죠. 지금 생각해도 수십 년간 쓰였다는 게 가슴 아플 따름입니다. 특별한 인식 없이 모두들 쓰고 있었던 것이죠.

 

 

Q. 한글 고유의 폰트 개발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홀로 창업하셨습니다. 직장인에서 한 기업의 대표로 서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을 텐데, 돌이켜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의미 있는 일을 했기 때문에 기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힘들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 가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회사를 만들고 혼자서 벌이가 시원찮아 3년은 끼니를 라면으로 때워야 했죠. 하지만 제게 한글 폰트를 만드는 일은 단순히 먹고 못 먹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 자신을 믿었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입니다. 한글 폰트 개발이라는 목표의식이 뚜렷했죠. 한글 폰트를 디자인한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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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도 석금호 대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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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꼴모임창립멤버

 

Q. 1990년대 컴퓨터의 등장으로 산돌커뮤니케이션에도 기회가 찾아옵니다. 첫 프로젝트를 맡으셨을 때 기분이 궁금합니다.

한글 폰트 시장이 커질 것이라는 예측은 전혀 못했습니다. 운이 좋았거나, 감각이 뛰어났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대적인 흐름과 제가 하고 있는 일의 시기가 맞은 것뿐이지요. 처음에는 대학 강의와 디자인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었죠. 제자들이 조금씩 도와주기도 했고요.

 

7~8년 정도 지났을 때, 컴퓨터가 나왔습니다. 1980년대 중반 GUI(graphical user interface) 방식의 매킨토시 컴퓨터와 레이저 프린터가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디티피(desktop publishing)시장이 열린 것이죠. 폰트 자체가 상품이 되는 시대가 되면서 일거리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로 맡은 큰 프로젝트가 당시 금성이라 불리던 기업의 워드프로세서 개발팀에서 발주한 일이었습니다. 레이저프린트에 폰트가 필요해서 저희에게 의뢰를 했죠. 할 일이 생겼다는 것에 대한 벅찬 감동, 지금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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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글 폰트 디자인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일은 무엇인지요?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 윈도우 비스타의 한글 기본 글씨체가 ‘굴림체’에서 산돌커뮤니케이션의 ‘맑은 고딕체’로 교체됐을 때였습니다. 무척이나 기뻤고 감동적이기까지 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한국지사에서 굴림체를 대체하는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지만, 처음에는 예산 문제로 무산됐습니다.

 

1년 후 미국 시애틀의 마이크로소프트 본사를 직접 방문해 설득했습니다. 타이포그래픽팀, 힌팅팀, 기술팀을 차례대로 브리핑하고 미팅한 결과 3일 만에 설득에 성공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본사와 직접 계약을 했습니다. ‘굴림체’가 아닌 ‘맑은 고딕’이 윈도우 운영체제에 추가될 수 있었습니다. 정체성이 모호한 서체가 사라질 수 있게 된 거죠. 우리가 직접 디자인 한 ‘맑은 고딕’이란 한글 폰트를 국민 PC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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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글을 사랑하는 한글 폰트 디자이너이자 한글 폰트 기업의 대표로서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지요?

산돌커뮤니케이션의 목표는 좋은 한글 폰트를 만들어 국가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데 있습니다. 동시에 산돌커뮤니케이션의 한글 폰트를 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폰트는 전 산업 요소에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영역입니다. 그 분야에서 부끄럽지 않은 한글 폰트를 개발하고자 합니다. 또 한글에 담겨있는 정신과 위대함을 더 많은 사람들이 가슴으로 느끼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소중한 한글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을 실천해 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