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나지막한 단층건물들, 미로처럼 얽힌 골목들, 그 사이를 함께 거닐고 뛰며 놀던 친구들. 그 공간에 쌓인 시간들은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정겨운 추억이자 소중한 역사가 된다. ‘인천 배다리’에는 주민들의 애착과 노력이 시간의 흔적들이 되어 곳곳에 배어 있다. 그들은 안다. 혼자가 아닌 함께라면 의미가 남다르다는 것을. ‘인천 배다리’는 공생이 있어 더욱 빛나는 곳이다. 새해를 맞아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인천 배다리’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뭐든 새롭고 소중하다. 그러나 그 소중함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모양새를 드러내거나 변색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정작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모른다. 그럴 때는 변해가는 세상을 바라보자. 그리고 지켜야할 것과 지켜야하는 것을 꼽아보고 그 이유를 종이에 적어보자. 인천 배다리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자신의 모습을 일깨워 주는 곳이다.
한 때 서해바다가 흘렀던 길
인천 배다리는 동구 금창동과 창영동, 송현동을 아우르는 곳이다. 배를 대는 다리가 있어 배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 이곳에는 개울도 있고 바닷물도 흘렀다. 밀물 때면 서해 바다에서 바닷물이 들어왔다.
1899년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됐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은 제물포 해안에 조계지를 만들었다. 조계지는 외국인들이 거주하며 자유롭게 상행위를 하기 위해 설정한 구역을 말한다. 그때 밀려난 조선인들이 바로 배다리와 송현동 근처에 모여 살았다. 인천 배다리는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함께 버텨온 역사적인 골목이다.
인천 배다리는 도원역과 동인천역 사이에 위치한다. 국철 1호선 도원역 3번 출구로 나와 배다리 마을 방면으로 걸어가면 된다. 도원역 2번 출구로 나와 경인선을 따라 가는 방법도 있다. 서울 용산역에서 급행을 타면 50분 정도 걸린다. 동인천역 4번 출구로 나와도 다다를 수 있다.
바다가 근처인 만큼 바다 냄새가 풍긴다. 역에서 내리니 건어물과 강냉이, 뻥튀기 등을 파는 상점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걷다보면 민트색의 일본식 건물이 보인다. 시선을 위로 올린다. 간판을 읽을 수 있다. ‘조흥상회.’
이곳 주민의 말에 따르면 ‘조흥상회’는 6·25때 폭격을 맞아 원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대신 골격을 살려 몇 차례 변화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과거에는 제수용품을 파는 곳이었다. 지금은 가죽공방인 ‘내가 만든 Bag메고’와 ‘나비날다 책방’이 반기고 있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돌면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 시작된다.
존재만으로도 멋진 ‘아벨서점·박경리서점’
골목길 이름은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지만 정작 남아 있는 헌책방은 몇 곳 없다. 과거에는 헌책방이 40여 곳이 있어 사람들로 붐비던 곳이었다. 때문에 현존하는 헌책방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배다리 헌책방의 마스코트라 불리는 ‘아벨서점’은 꼭 들르라고 권하고 싶다. 외관은 작고 낡아 보인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입이 벌어질 만큼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높은 책장과 그 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책들은 시선을 붙잡는다. 오래된 석유난로와 그 위에 놓인 주전자도 추억을 되살려 준다.
경사가 급한 나무계단을 올라 아지트를 연상케 하는 2층으로 올라가면 ‘아벨전시관’이 펼쳐진다. 사방이 나무로 꾸며져 있고 가운데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여기서는 매달 ‘배다리 시낭송’이 열리며 자작시나 글, 좋아하는 글귀들을 가져와 낭독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다. 회비는 없다. ‘아벨전시관’에는 <토지>의 박경리 소설가를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놓았다. 아벨서점 곽현숙 대표 말에 따르면 박경리 소설가는 젊은 시절, 배다리에서 헌책방을 운영했다고 한다.
2015년 아벨서점은 42주년을 맞아 ‘책으로 말하는 역사관’을 개관했다. 잡지 소장가 서상진 선생의 ‘근대 잡지초대전’을 시작으로 아벨이 소장하고 있는 소설, 수필, 시집, 역사책 순으로 이어질 계획이다. 금, 토, 일만 개장한다. 단, 책의 내용은 촬영금지이다.
옛 인천양조장 건물에 사는 배다리 깡통로봇
‘아벨서점’을 나와 건너편에 위치한 ‘삼성서림’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대안적 미술활동 공간인 ‘스페이스 빔’을 볼 수 있다. 사람보다 큰 깡통로봇이 이곳을 지키고 있어 찾기는 쉽다. 옛 공장을 연상케 하는 이곳은 인천 향토막걸리로 유명한 ‘소성주(邵城酒)’를 생산하던 양조장이다. 물맛이 달라져 공장은 이전했지만 1927년부터 있던 건물인 만큼 그 가치가 남다르다.
스페이스 빔은 스터디 진행과 미술전문지 발간, 전시기획 등을 주로 하고 있다. 인천 구월동에 개관했다가 2007년 근대 인천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인천 배다리로 이전했다. 지금은 ‘지역공동체 문화 만들기’를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들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좀 더 올라가면 ‘나눔가게 돌고(庫)’라는 특이한 이름의 가게가 나온다. 돈이 없어도 필요 없는 물건을 가져와 필요한 물건으로 바꿔갈 수 있는 곳이다. 안 쓰는 물건은 가져오고, 필요한 물건은 가져간다. 그 사이에 오가는 ‘정’은 덤이다. 매매방법은 쪽지를 남기면 된다. 기증한 사람은 물건을 남기는 사연을, 가져가는 사람은 감사의 글을 전하면 된다. 인천 배다리를 산책하기 전, 집에 안 쓰는 물건을 가져와 작은 나눔을 실천하는 것도 좋겠다.
인천 배다리는 ‘공존’과 ‘행복’, ‘희망’이 숨 쉰다. 동네 주민들은 서로의 존재에 고마움을 느끼며 마을을 소중하게 가꿔내고 있다. 뒤늦게 정착한 젊은 예술가들은 마을의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한 지역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다. 올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어떤 계획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중인가? 그렇다면 인천 배다리를 찾아 이곳에서 그 답을 찾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