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투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간호의 시작입니다! 대한민국 간호학 박사 1호, 아하가족성장연구소 김수지 이사장

 

어린 시절부터 70대가 될 때까지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있을까? 아하가족성장연구소 김수지 이사장은 7살 때부터 간호사의 꿈을 키워왔고, 70 나이를 넘긴 현재 그는 우리나라 간호학의 발전을 위해 지금도 노력하는 중이다. 그는 대한민국 간호학 박사 1호이자 ‘한국의 나이팅게일’로 불린다. 70대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그는 몇 년 전 아프리카 말라위로 떠나 그곳에서 대양간호대학 학장을 맡아 간호사를 양성하는 한편 말라위의 간호환경을 개선하기도 했다. 그가 지금껏 60년 가까이 간호학계에 몸담아오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들어보고, 말라위에서 봉사를 하면서 느꼈던 점과 좋은 간호란 무엇인지 등에 대해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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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처음 간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일곱 살 때라고 들었습니다. 대학을 가기 까지 많은 시간이 있었을 텐데 그 동안 계속 같은 꿈을 꾸게 된 이유가 있다면요?

제가 7살 때 총상을 입은 한 청년을 극진히 돌봐 살려낸 한 아주머니를 뵌 적이 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인상 깊어서 아주머니께 뭐 하는 분이시냐고 물었더니 ‘간호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저는 간호사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2년 뒤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저는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해 주는 후송병원에서 심부름도 하고, 군인 아저씨들의 위문편지를 대필해주곤 했습니다. 당시 군인들은 저를 ‘꼬마 간호사’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적십자 반에 들어가 활동도 하고 방학 때면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봐주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꾸준히 돌봄 활동을 하며 간호사의 꿈을 키워 왔습니다.

 

 

Q. 간호사가 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간호사가 되는 과정에 겪은 어려움은 없었나요?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간호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입학금이 없었어요. 그러나 사람의 인연은 참 대단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굴 만나느냐가 참 중요하죠. 제가 숙명여고 재학 당시 유네스코와 숙명여고가 국제아동미술전람회를 공동으로 개최했습니다.

그때 심사위원 중 한 분이었던 미국인 벨로 여사가 우리 학교 미술시간에 뎃쌍 수업을 한 시간 하시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날 통역을 하기로 한 영어선생님께서 오시지 못해 대신 제가 통역을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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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왕래를 하며 지내던 어느 날 그분이 제게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어요. 저는 망설임 없이 간호사가 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후 그분은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곤 어느 날 벨로 여사에게서 보낸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제가 가고 싶어 하던 간호대학에 들어갔을 거라며 용돈 하라고 100달러를 보낸 것이었어요.

편지가 도착한 날이 바로 대학 입학에 필요한 등록금 납부 마감일이었고 저는 그 돈으로 무사히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 100달러는 등록금을 내고도 남는 돈이었죠. 그 도움으로 저는 무사히 간호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사람들과의 만남이 참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꾸준히 벨로 여사에게 편지로 안부를 전하곤 했습니다. 그때 제가 벨로 여사로부터 받은 온정과 사랑을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며 베푸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Q. 간호사가 되고 나서 수많은 환자분들을 만나셨을 텐데요.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계시다면요?

제가 하와이에서 일할 당시 한 여성 간암 환자가 있었습니다. 흑인인 그녀에게는 11살짜리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학교만 끝나면 병원에 와서 저에게 우리 엄마 살려달라고 졸라대곤 했습니다. 매일 졸졸 따라다니며 하도 귀찮게 하기에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지하 식당으로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물어봤어요. 아이에게 메모지를 한 장 주면서 엄마가 살아야 하는 이유 10가지를 써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삐뚤 빼뚤한 글씨로 ‘I have nothing but my mother’이라고 10번을 적은 거예요. 아이에겐 이 세상에 엄마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는 엄마가 꼭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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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회진시간에 주치의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치의가 아이의 소원이 이루어 지도록 다 함께 기도하며 최선을 다 해보자고 했죠. 그렇게 저희는 정성을 다해 그녀를 돌보았고, 정말 그녀의 병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두 달 만에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커서 간호사가 되었습니다(웃음).

 

 

Q. 간호를 하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 있다면요?

죽을뻔했던 사람이 살아나는 순간이 제일 기뻤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저희 시어머니입니다. 어머님께서는 제가 남편과 약혼을 한 상태에서 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어머님은 거의 돌아가시기 직전의 상태였고 저희 부부는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서둘러 결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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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주변에서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시어머니가 저렇게 됐다’는 얘기가 제 귀에 들려 왔습니다. 저는 즉시 어머님의 손을 붙잡고 온 힘을 다해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꼭 살려달라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는지 어머님께서는 곧 의식을 되찾으셨습니다.

저는 어머님께 무엇이든지 잡수시고 기운을 차리셔야 한다며 꿀물을 타서 입에 넣어드렸습니다. 3일 동안 아무것도 드신 것도 없고 링거도 흡수가 되지 않아 들어가지 못한 상태였던 어머님께 꿀물을 먹이는 저를 식구들 조차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죠. 그럼에도 저는 어머니를 일으켜 앉혀 등뒤를 받친 상태로 “어머니, 사시고 싶으시면 이것을 꼭 드셔야 해요! 어머님은 삼키실 수 있어요. 자- 꿀-꺽, 꿀-꺽”라고 하면서 수저의 꿀물을 입에 넣어드렸는데, 어머님께서는 그 꿀물을 삼키셨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하면서 미음, 죽, 밥 등 고형식사로 영양을 섭취하시게 되었고, 그 후로 18년을 더 살다 가셨습니다. 사랑과 지극 정성의 간호는 환자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때 배우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Q. 사람의 건강과 관련된 만큼 간호를 하면서 어려움도 겪으셨을 것 같습니다.

1960년대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먹고 살기 어렵다 보니 거의 병원을 늦게 찾아오곤 했어요. 특히 암환자인 경우 병원에 올 때는 거의 말기가 되어 왔습니다. 그분들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너무 늦게 오셔서 한 두어 달밖에 못 산다는 진단을 받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만 알려주고 환자들에게는 보통 알리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맹장수술을 환자일 경우, ‘수술이 잘 되었으니, 심호흡을 시작으로 움직이고 잘 드시면 빨리 낫습니다’라고 계속 응원을 해주면 빠른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당시 암 환자들에게는 그분들의 상태와 병세를 설명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주치의가 말해주지 않는데 제가 나서서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가능한 환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활력증상 측정, 투약할 약, 상처부위 소독 등을 빨리 끝내고 환자를 뒤로 한채 병실을 나오는 일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간호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주치의에게 환자의 상태를 알려줘야 하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여쭈었습니다. 제 말을 들은 주치의는 웃으면서 ‘간호나 잘하세요’라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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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건들은 정신적으로 제게 많은 혼란을 주었습니다. 당시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처리하는 법은 배웠어도 그 사람의 죽음을 정서적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는 배워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이 어렵다고 해서 그냥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저는 호스피스 케어를 배웠고, 간호에 그것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것을 다르게 생각하고 추구하면 또 다른 것을 배우고 적용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Q. 이사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간호란 무엇인가요?

간호란 대상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극정성 돌보는 모든 활동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마음’이란 산모가 갓 태어난 어린 아기를 향해 긍휼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간호의 초점은 사람입니다. 때문에 사람의 몸, 사회적인 환경, 인간관계 등을 함께 다뤄야 합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해야 간호를 잘 할 수 있습니다. 간호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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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70대라는 나이에 말라위로 떠나셨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어떤 계기로 떠나시게 되었나요?

2010년 12월, 제가 한창 바쁘게 지내던 시기에 말라위에서 온 백영심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당시 20년 넘게 말라위에서 의료봉사를 해온 분입니다. 말라위는 간호인력이 너무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봉구와무타리카 대통령의 특별한 부탁으로 간호학교를 세웠다고 하더라고요. 건물도 짓고 학생들도 다 뽑았는데 정작 교장이 없다며 저에게 그 자리를 제안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듬해 3월부터 일본의 한 대학의 석좌교수로 가기로 되어있었고, 나이도 나이인지라 거절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백 선교사께서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고(故) 이태석 신부의 다큐 영화인 <울지마, 톤즈>가 생각났습니다. 마침 그 영화를 보름 전쯤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터라 백 선교사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그 분이 암 수술을 받기 전날 병원엘 찾아갔습니다. 그 때 저에게 비행기 스케줄을 주시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저는 6일 뒤인 2011년 1월 1일에 말라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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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말라위에서 어떠한 일을 하셨나요?

말라위는 인구의 85%가 전기나 물, 도로가 없는 시골 전통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말라리아, 후천성면역결핍증인 에이즈(AIDS) 환자들이 많았고, 특히 임신 및 출산과 관련된 모성사망율이 높고 5세미만의 아동사망율도 높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병원에 입원한 환자 간호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임산부를 돌보는 조산 활동, 보건간호 등 다양한 역할을 해야 할 간호사를 양성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3년제로 설립된 대양간호대학의 학생들은 병원밖에서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산사, 보건간호사 역할을 통합. 수행할 수 있는 교과과정을 개발하여 4년제 학사 프로그램(BSc in Nursing & Midwifery)으로 승격시켰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 병원임상 경험을 쌓은 뒤, 고향으로 내려가 자기 종족의 건강을 관리하는 간호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Q. ‘국제간호대상’,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 등 다양한 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소감이 어떠신지요.

간호사로서 최고의 영예라는 국제간호대상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상을 받은 것은 개인적으로 정말 영광입니다. 국제간호대상은 간호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며, 2년에 한 번씩 전 세계 간호사들 중 한 명에게만 시상하는 상입니다. 간호의 실무뿐 아니라 연구, 교육, 이론을 발전시킨 사람에게 주는 상이죠. 이 상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사람 돌봄이 이론’ 덕분입니다. 이 이론은 UNDP의 자금을 받아 정신질환자들을 돌보면서 그 효과를 검증한 연구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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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덕에 제 이론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큰 상을 타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이 상은 특별히 저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수행한 20명의 동료 정신보건간호사들과 500여명의 환자 및 가족들이 있었기에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은 국제적십자사에서 주는 상입니다. 40여 년 동안 간호사로서 실무, 교육, 연구, 봉사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것을 기특하게 여겨서 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더욱 봉사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가 담긴 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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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하가족성장연구소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그리고 이곳에 계시면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요.

우리나라가 최근 급속한 산업화가 되면서 제일 와해되는 것이 바로 가정입니다. 부부나 부모와 자식 간에 문제가 생겨 원래의 가족기능을 잘 못하고 있는 가정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하가족성장연구소는 바로 그런 분들이 가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상담을 비롯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정은 생명이 잉태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생명이 생명답게 건강하게 자라는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제 전공이 정신간호학이라 아하가족성장연구소의 미션이나 비전과 맞고, 또한 이 일을 시작한 이화자 소장님과 김온양 대표님과 인생의 오랜 친구로서 이사장 역할을 맡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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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앞으로의 꿈이나 목표가 있으시다면요?

저는 평생 사람을 돌보는 간호사로 살고 싶습니다. 몸의 질병뿐 아니라 여러가지 환경적 형편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개인과 가족, 그리고 학교, 직장 등 지역사회의 단위 포함)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개인 및 집단에게 다양한 생활현장에서 사랑으로 돌보는 활동을 확산시켜 자기 스스로 건강하게 성장해 가는 삶을 맛 보는 동시에 나와 관계하는 이웃 역시 함께 더불어 성장하고 살 맛 나는, 건강하고 밝은 사회를 이루어 가는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에는 정서.심리적 약자들의 변화와 성장을 위한 ‘좋은 의자’라는 재단이 만들어 졌습니다. 불안과 우울, 강박 등으로 현 우리 사회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기 쉬운 분들에게 자신과 세상을 보는 생각의 틀을 바꾸고 그들의 능력을 잘 활용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려고 설립된 비영리 법인 재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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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끝으로 간호사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간호사는 사람을 지극정성 사랑으로 도와야 합니다. 도와준다는 것이 꼭 내 것을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더 많이 받아요. 심리적인 보상이 있고 보람도 큽니다. 간호사가 되려면 우선 사람을 좋아하고, 자신이 남을 섬길 마음이 있는가 고민해봐야 합니다. 간호학은 정말 독특한 학문이며 간호는 돕는 대상자에 따라 특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의학은 신체의 일부분의 특별한 병리 현상이나 잘못된 부분을 진단하고 찾아내어 치료합니다. 하지만 간호학은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전인적으로 돌봄으로써 질병회복은 물론이고 재활, 추후 관리, 예방 활동에까지 관여합니다.

제 제자 중에 간호학을 배우면서 건축을 하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간호대학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다시 건축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건축이 너무 재미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간호학의 눈으로 건축을 보게 되니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집 구조나 가구 등을 환자들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건축과 간호의 융합도 가능한 것입니다.

간호는 이처럼 ‘간호’ 하나만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양한 분야와 연결 짓다 보면 건강하고 밝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보다 더 색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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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김수지

1942년 전라남도 여수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보스턴대학교대학원에서 간호학 박사, 소련 펜자주립대학교에서 명예문학 박사과정을 이수한 국내 간호학 박사 1호다. 이화여대 간호과학대 교수를 역임하다 서울사이버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전인건강간호학회, 대한정신과 간호학회, 한국호스피스협회의 회장과 SNC Academy 원장을 맡아왔다. 간호의 실무와 이론, 교육, 연구 등에 힘쓴 결과, 간호사 최고의 영예라는 국제간호대상과 제41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상을 받았다. 현재 그녀는 사단법인 아하가족성장연구소 이사장으로 여전히 사회에 봉사하고 있다.